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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자용의 민화 연구와 민화 운동
작성자 FACO예술인복지몰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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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22-02-28 13:5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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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1

조자용의 민화 연구와 민화 운동

Ⅰ. 머리말

“한국민화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그 속의 호랑이나 용이나 토끼나 닭이나 꿩이나 거북이가 다 우리들과 같이 춤출 수 있는 친구들로 그린 그림이다. 

필요할 때는 비도 오게 하고 귀신도 쫓아주고 복도 갖다 주는 영물들이다. 

그 속의 나무나 바위나 물이나 구름까지도 다 신령이 깃든 대상들이다.1)

조자용(趙子庸, 1926~2000)이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민화를 전시할 때 자원봉사자들이 미국 관람객들에게 민화를 설명하던 내용이다. 

수송비가 없어 민화를 병풍이나 족자에서 떼어 하나씩 말아 깡통에 넣어 들고 가서 현장에서 직접 배접하는 등 힘든 일도 많았지만 미국 전시에서의 민화에 대한 솔직한 화평은 한국에서 편견을 극복하고자 고독했던 그에게 큰 기쁨과 용기을 주었다.

조자용은 까치 호랑이 민화를 만나 그 속에 우리 고유의 신앙과 문화가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최초의 민화 박물관인 에밀레 박물관을 만들어 미친 사람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민화를 수집하였다.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박물관의 민화들을 외국에 나가서 봐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 덕분에 민화에 대한 관심이 점차 확산되어 왔고, 그 결과 최근에 민화에 대한 관심이 더욱 증폭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조자용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시행되지 않고 있어 우선적으로 민화와 관련된 활동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그의 민화 연구와 민화 운동 그리고 민학 운동, 민중박물관협회 창립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장에서는 조자용의 민화 연구 결과를 고찰해 보고 Ⅲ장에서는 에밀레 박물관을 통한 그의 민학 운동과 박물관 운동을 정리해 보겠다. 

마지막으로 Ⅳ장에서는 그의 강연과저술 그리고 전시를 통한 민화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기여한 그의 활동에 대해 논의해 보겠다.

Ⅱ. 한국 민화의 본격적 연구

조자용이 민화를 처음 만났던 1960년대 말에는 민족정신과 문화에 대한 자각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하던 때였던 것이다. 

한국전쟁 후 우리나라는 국가주의 경향이 강하게 작용하여 경제 발전에만 전력을 기울였던 시기였다.

그러나 어느 정도 폐허가 회복되고 경제가 성장하자 현대화의 뒷면에 가려져 있던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이나 문화에 대하여 뒤돌아보는 현상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조자용이 한국 민화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게 된 것도 이런 시대적 정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 “민화” 용어의 최초 사용

조자용은 1970년 국제 PEN 대회 때 내놓은 『The Humour of Korean Tiger(한국 호랑이의 해학)』에서 “Korean folk painting (한국 민화)”이란 용어를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하였다. 

사실 민화(民畵)라는 용어는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가 처음 사용하였다. 

1929년에 오쯔에(大津畫)를 민화로 소개하였는데 이때 민화라는 용어가 언급되었다.

야나기는 오츠에가 회화의 본질을 응축한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야나기가 1957년 일본의 『민예』지에 한국 민화를 격찬하였지만 그 당시 한국 내에서는 아직까지도 민화 이야기를 들어 볼 수가 없었다.

민화를 인사동 골동품가게에서는 외국인들이 많이 사가니까 Yangki Moki(양키무끼)6) 라고 부르고 있을 때였다.

조자용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민화와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1967년에 조자용이 골동품상에서 다른 그림을 구입하였는데 그것을 싸준 포장지가 바로 피카소 까치 호랑이(일명 호덕이)였던 것이다.

이 까치 호랑이는 가장 한국을 대표하는 민화가 되었고 88호돌이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조자용은 에밀레 하우스의 개관전을 마치고 1969년 월남 출장길에 동경에 들러 일본 민예관에서 『민예』지 두 권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때 야나기의 「조선의 민화」란 글에서 우리 스스로 한국 민화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았다는 말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민화에 대한 글을 쓰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는 출장에서 돌아오자 까치 호랑이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호랑이 그림 민화에 관한 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The Humor of Korean Tiger(한국 호랑이의 해학)』이다. 

이 책에서 “한국 민화”라고 지칭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조자용은 까치 호랑이를 이야기하면서 Korean folk painting (한국 민화)란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였다

“Most of the tiger paintings we find in Korea today fall under the Korean folk painting of so-called magpie tiger, the charming name given by the American soldiers who have been taken them home since 1945.”

지금 한국에서 볼수 있는 대부분의 호랑이 그림들은 1945년 이후 그림을 가지고 귀국했던 미군들에 의해 붙여진 매력적인 이름인 흔히 까치 호랑이로 불리는 한국 민화의 범주에 속한다.

『The Humor of the Korean Tiger』를 출판한 해에 조선 호텔에서 “해학” 을 주제로 세계 PEN대회가 열렸는데 이때 이 책을 세계 문인들에게 첫 선을 보이게 되었다. 

중국 사람이 첫 장을 넘기더니 옆에 있는 친구에게 호랑이 담배 피우는 그림을 보여 주며 중국말로 떠들며 웃었다. 

그 순간 조자용은 호랑이가 한국인의 해학의 원천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조자용은 야나기의 영향을 받았지만 야나기가 “조선의 미는 비애의 미”라고 한 것에 대하여 우리 민족성이 해학적이라는 주장에 동참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여 진다.

민화 용어 공식적 사용에 대한 김철순의 의견을 살펴보면 그의 논문 「한국 민화의 주제와 정신」에서 조자용은 한국 민화에 관하여 제일 먼저, 가장 많은 글을 썼고 여러 가지 책을 펴냈다고 밝히고 있다.


2. 야나기의 영향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운동은 한국 민화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야나기는 이름 없는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생활용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미에 대한 개념과 공예이론을 새롭게 전개한 민예운동에 있어서는 세계적인 인물이다.

조자용 역시 야나기의 영향을 받아 양키무끼로 불리던 그림들을 민화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자용은 한국 민화가 야나기의 민화와는 차이가 존재함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조자용의 “넓은 의미의 민화관”에 의한 것이고 우리 민화가 광범위 했고 단순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이 된다.

야나기의 민예운동은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19세기 윌리암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는 소수를 위한 예술을 추구하기 보다는 민중에 의해 만들어 지고 민중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참된 예술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런 모리스 사상의 시작은 산업혁명 후의 비참한 노동자의 삶을 보면서 산업화, 기계화를 반대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당시 제국주의에 의심을 느끼고 있던 일본의 지식인들에게 전해져 야나기가 펼친 민예운동의 근원이 되었다. 

야나기의 철학적 사상의 바탕이 되는 것은 윌리암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 영국시인)와 윌트 휘트만(Walt Whitman, 1819~1892, 미국시인)의 정신이었다. 야나기가 이들에게 배운 것은 생활 속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생활 철학이었다.

야나기는 이런 사상적 바탕 속에서 민예운동을 이론적으로 펼쳐 나갔고, 전통을 잃는 것은 혼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여 민예관이란 박물관을 건립하여 민예운동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이런 야나기의 활동은 애국주의가 포함되었지만 문화적인 면을 강조한 문화적 민족주의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제국주의에 대한 찬성은 아니라고 보인다.

야나기의 영향을 받은 조자용의 민화 운동 정신은 1973년 「이조민화의 심」에서 엿볼 수 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조자용은 평등한 모습의 인간에 의해 수복벽사의 신앙을 위해 그려진 만인에게 사랑받는 미술이 민화라고 하였다.

이런 조자용의 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었다고 보여 진다. 모리스에서 야나기, 그리고 조자용으로 이어지는 정신은 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이었다.

야나기는 조선의 민화는 미와 추의 갈등을 모르고 그래서 망설임과 두려움도 없는 그림이라며 조선 민화가 아주 매혹적이었다고 고백하면서 그가 병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가사의한 조선민화」라는 글을 남겼다.

그리고 그는 오늘날(야나기가 이 글을 쓴 당시)에 이런 민화와 같은 그림을 그린다면 초사실적인 점과 추상적인 점에서 인정받을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조자용 역시 『한국 민화의 멋』에서 피카소가 1938년 히틀러의 스페인 폭격에 항의하는 뜻으로 그린 수탉 그림과 귀신을 쫓기 위한 한국 민화의 수탉그림을 추상화로 비교하면서 우리 민화의 한국적 추상성을 주장하고 있다.

3. 조자용의 넓은 의미의 민화

조자용은 민화의 개념으로는 생활화로서 삶, 얼, 멋의 그림이라고 보았다. 

이것을 그가 설명한대로 풀어보면 “쓸모 있고, 얼이 박히고, 멋이 있는 그림”이다. 

비록 쟁이들이 기분에 따라 그린 즉흥적인 그림이지만 생활공간을 꾸미고 행사에 사용하였다는 것은 우리 민족이 그만큼 그림을 좋아하였으며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민화는 조자용의 말대로 국민 전체가 참여하여 만들어 낸 국민(國民)적인 멋을 표현한 그림인 것이다.

국민 전체라 함은 조자용의 넓은 의미의 민화관으로 설명해야 옳을 것이다. 

한국 민화의 “민”은 근본적으로 그 개념을 달리하는데 민을 꼭 사회적이나 정치적으로만 해석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민을 문화적으로, 예술적으로, 미술적으로, 민예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그 민은 반드시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민과 일치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세종이 우리나라 대중음악을 궁중에서 연주하도록 하였고 대원군이 판소리를 즐겼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조자용은 넓은 뜻의 한국 민화란 왕이나 궁중화가나 백성들 그 누구라도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그려낸 “멋의 그림”이라고 말하고 있다

4. 조자용의 한국화 개념

조자용은 민화가 종교화와 정통화로 갈라지기 전의 그림의 모습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민화는 한국화의 기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민화가 사람들에게 재발견 되는 순간 많은 사랑을 받게 된 것은 한국화의 올바른 정립을 위해서 경축할 일이라 하였다.

또한 까치 호랑이나 산신도를 통하여 가장 신성한 것이나 가장 무서운 것을 가장 웃기는 예술로 표현할 수 있었던 수준 높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한국화의 바탕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한국화의 정립은 호랑이 그림에서 출발해야 함을 확신하였다.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1910~1996) 도 호랑이 그림이 사람을 괴롭히는 무서운 호랑이를 순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그릴 수 있었던 한국인의 민족성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한국화의 절정이란 말을 하였다.

코벨은 코리아 저널(Korea journal) 등에 조자용에 대한 글을 썼고 호랑이 그림을 통하여 일본에 남은 한국 미술품을 밝힌 미술사학자이다. 코벨이 일본에 남아있는 고려불화에 대해서 쓴 논문을 보면 조자용의 영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대덕사 소장의 <양류관세음보살> 불화는 14세기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는, 매우 귀한 연대의 그림이다. 

어떤 면에서는 한국의 가장 오래된 민화일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이 불화 하나만으로도 한국미술사는 뒤집어질 수밖에 없다

당시 조자용은 무명의 채색화를 모두 민화로 포함 시켰던 시절이었다. 

그것은 조자용의 민화 연구의 오류라기보다는 그 당시 궁중화나 불화 등의 채색화에 대한 미술사학계의 무관심에서 유발된 상황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야나기도 조선의 민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독자적인 화풍을 인정하였다.

“모두 조선풍으로 이루어져 있어 결코 중국의 모방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조선의 민화는 확실하고 독자적인 세계를 이루고 있어 결코 다른 나라의 화풍에 종속된 표현을 하고 있지는 않다” 


조자용은 까치 호랑이 민화를 통하여 한국화(韓國畵)의 개념을 정립시키기 위한 나름대로의 네 가지 기준을 제시하였다. 

첫째는 한국화의 민족적 사상, 둘째는 한국화의 민속상의 위치, 셋째는 한국화의 미술적 독창성, 넷째는 한국화의 전통적 예맥(藝脈)이다.

아직도 동양화란 이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화를 더욱 풍부하게 해줄 민화의 가치를 한국 회화사에 끌어 낼 때가 되었다고 보여 진다. 

민화가 미술사에 등장하지 못하는 이유가 미술 사료로서의 요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논고에 대해 연구자는 조심스럽게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홍가이는 민화의 구조나 색채, 미적 감각 등이 너무나 뛰어나고 창의적이어서 어떻게 이처럼 훌륭한 한국인들의 작품을 한국회화사가 그 범주에서 무시하고 제외해 버릴 수 있는 것일까 놀라움을 표시하였다.

또한 조자용은 산신도가 본을 떠서 대량 생산하는 불화와는 다른 점이 많은 채색화임을 알게 되었다. 

거기다 외래에서 들어 온 종교에 의해서 조형적인 면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고 우리 고유의 채색화의 맥을 잇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37)

우리 전통의 채색화는 조선조 중기 이후에는 한국화에서 소외되어 왔고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화의 도입, 그리고 근대 이후에는 문인화 우월의식 때문에 민화를 비롯한 전통 채색화의 계승이 미흡하여 80년대 이후 한국화가 정체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코벨도 정통화와 민화를 차별하는 편견이 없어져야 한다면서 그 나라의 예술은 가장 믿을 수 있는 그 나라의 역사라고 말하였다.

우리의 다양하고 독창적인 모든 회화들에 대한 관심이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시점에 드디어 한국회화사의 주류는 채색화라는 강한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조자용의 민화 운동 중에서 외국전시를 기획한 것은 그의 남다른 추진력과 집념의 결과로 보인다. 

그는 한국 민화의 회화적 독창성과 우수함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이 미국에서의 민화 전시와 일본에서의 민화 전시와 도록 발간으로 보인다.

최초로 우리 민화가 외국으로 전시를 나간 것은 1972년 일본 동경화랑에서 “이조기의 영정과 민중화”란 민화전이었다. 에밀레의 소장품인 민화 9점과 일본인들이 소장하고 있던 초상화 12점으로 전시가 진행되었다.

조자용의 미국 전시는 1975년 11월 에밀레박물관의 민화 32점을 가지고 미국 하와이로 향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와이 동서 문화센터 소식지에 실린 개막식 사진을 보면 호피장막도와 문자도 병풍이 보인다. 그

는 수송비가 없어 그림을 족자나 병풍에서 분리해 말아서 양철깡통에 넣어서 들고 갔다. 

밤에는 그림을 잃어 버릴까봐 침대 매트리스 밑에 깔고 잤다고 한다. 가지고 간 그림은 현장에서 직접 배접을 하였다. 

1976년 2월 하와이 대학 전시는 제목을 “금강산에서 온 보물들 (Treasures from Diamond Mountain)” 로 정했다. 

전시장에 산신각을 마련하고 산신 탱화를 걸었다. 전시 개막식에는 산신각 앞에 시루떡을 놓고 고사를 지냈다. 

그러나 전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하와이 대학 학생들 위주로 마련된 것이라 학술적인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이때 존 코벨이 적극적으로 도와 주었다. 여기서 코벨과 조자용의 인연이 밝혀지고 있다. 

조자용은 코벨에게 미술사를 배우던 학생들에게 10회에 걸쳐 민화에 관한 특강을 하였다. 

학생들의 민화에 대한 솔직한 화평은 그동안 한국에서의 민화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자 고독했던 그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그는 갑작스런 심장병이 발병하여 미국 전시를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1977년 건강을 회복한 조자용은 다시 미국 본토 전시의 길에 올랐다. 

파사디나 (Pasadena)전시가 미국 본토에서는 처음 갖는 한국 민화전이 되었다. 

그는 파사디나 전시의 개막식에서 운룡도를 걸고 기우제를 지내기로 결정하고 포도주를 바치며 용신에게 절을 올렸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져 기우제를 지내고 난 후 예보에도 없던 비가 쏟아 져 미국 신문에 한국 기우제(Korean Rainmakers)의 기사와 사진이 났고 국내 신문에도 기사가 났다. 

LA타임지의 저명한 미술평론가 윌리암 윌슨(William Wilson, 1934~2013)은 몰래 와서 구석구석 살피고 가서 대단한 논평을 하였다.

“민화라는 개념으로 본다면 너무나 뛰어난 그림들이다. 

이것은 다른 나라의 명작들과 꼭 맞먹는 걸작들이다. 한국 사람들은 이런 명작을 귀신 쫓기 위하여 대문짝에다 걸고 살았다”

이 일로 조자용은 10년 동안 마음으로 갈망해 왔던 민화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으니 그때의 기쁨을 잊을 수 없었다.

1979년 조자용은 다시 미국 전시의 길에 올랐다. 이때 처음으로 개최된 시애틀 민화전은 1979년 12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워싱턴 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 안에 있는 박물관에서 전시제목을 “Spirit of the Tiger”로 정하고 진행되었다. 

개막 행사에 700명이 참석하였다.시애틀 민화전이 진행되고 있을 때 시애틀미술관에서는 “한국미술 5000년전”이 열리고 있어 마치 기획이나 한 것처럼 대조적인 미술전이 열리게 되었다. 

이때 조자용은 4개월 동안 시애틀에 머물면서 매일 오후에 한 시간씩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진행하였다. 

1980년 LA 라호야 (La Jolla) 민예관 전시 기간 중에는 3개월 동안 「이조민화개론」을 썼다.

1981년 오클랜드시립박물관 전시는 갑자기 이루어져 70폭의 민화를 다시 표구해야 했다. 
그리고 전시장 안에 한옥을 짓기로 계획하고 설계도를 만들어 박물관 학예관에게 건네니 한국에서는 박물관장이 건축 설계까지 하느냐고 놀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흑인들이 지은 최초의 한옥이었다.

Ⅴ. 맺음말

민화는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와 고유문화가 잘 드러나 있고 우리 생활 속에서 오랫동안 함께 해 온 그림이 틀림없지만 한국회화사에서는 제외 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솔직한 현실이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민화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한국에서 민화에 대한 최초의 연구자인 조자용은 1967년에 인사동에서 운명적인 “까치 호랑이”를 만났고 1968년에는 민화박물관인 에밀레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야나기의 영향으로 1970년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민화책 『Humor of the Korean Tiger』를 발간한 후 본격적인 민화연구와 민화 운동을 전개하여 민화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조자용은 넓은 의미의 민화관을 펼쳐 민화가 전 국민이 이루어 낸 멋의 그림이란 이론으로 미술인들이 꿈꾸는 미술의 유토피아인 미술의 대중화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호랑이 민화에서 한국인의 해학성을 발견하였고 호랑이 민화가 전통 채색화의 맥을 잇고 있는 독창적인 그림임을 밝혀 한국화 재정립의 기초를 세워 놓았다.

그는 한국 최초의 민화박물관을 개관하여 많은 민예박물관에게 길을 열어 주었고, 민학 운동를 통하여 세계적 민예 운동에 참여하는 큰 의미를 남겼다. 

그리고 “박물관 1000개 운동”을 주장하면서 민학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한국민중박물관협회를 창립하여 한국박물관협회의 기틀을 다지기도 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민화 속에 흐르는 고유의 맥을 깨닫고 민화 운동에 그의 모든 열정을 바쳤다. 

그 과정에서 비록 좌절이 있었다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가 민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은 헌신적인 진실이 전해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후학들의 활발한 연구와 활동으로 그가 그토록 지키고자 노력했던 한국성의 원류인 민화의 세계를 활짝 피울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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