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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진정한 후원자가 현대미술 중심지 만들었다!
    작성자 FACO예술인복지몰 (ip:)
    • 평점 0점  
    • 작성일 2021-03-30 10: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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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32



    진정한 후원자가 현대미술 중심지 만들었다!


    [의학신문·일간보사] 휘트니 미술관을 건립한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1875-1942)는 여성 조각가였다. 

    미국에서는 여성이 1920년에야 투표권을 쟁취했으니 미술계에서, 그것도 고된 육체노동을 수반하는 조각에서 여성이 작가로 인정받기는 참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그것은 로댕의 제자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비운의 여류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1864-1943)의 생애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라는 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녀는 철도왕 코넬리우스 밴더빌트의 증손녀이며, 남편 휘트니는 정치가이자 금융가 집안의 자제였다는 점이 남다르기는 하다. 

    아무튼 거트루드는 1930년 휘트니미술관을 설립했는데, 정식 명칭은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로 미술관의 활동 영역을 미국미술로 국한한 점이 특이하다. 그녀는 과연 어떤 뜻에서 미국미술에만 집중하는 미술관을 건립한 것일까?

    거트루드, 1930년 `휘트니미술관` 설립

    상상을 초월하는 부자 집안에서 태어난 거트루드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수첩에 드로잉과 수채화를 그리며 미술에 관심을 보였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 코넬리우스 밴더빌트 2세가 사업가이자 자선가로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집행위원회 의장이었으며, 이사로 20여년간 봉사했던 미술애호가였다. 
    그녀는 아버지가 소장한 바르비종 화파 컬렉션을 보며 미술과 친근한 분위기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1896년 휘트니와 결혼 후 그녀는 미술과 자선사업에 관한 관심이 점점 커졌는데, 남편의 외도에서 비롯된 자괴감과 우울함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1901년 파리 여행에서 몽마르트와 몽파르나스의 예술적인 분위기를 경험한 후 조각가가 되기로 결정한 그녀는 뉴욕으로 돌아와서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공부하고 다시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도 조각 공부를 하며 로댕의 비평을 받기도 했다.

    1901년 그녀는 처음으로 공공 조각 작품을 의뢰받아 제작하게 되었다. 

    `염원`이라는 제목의 등신대 남성 누드 조각상으로 뉴욕 버펄로에서 개최된 범미 박람회 기간 뉴욕주 청사 앞에 설치되었다. 한가지 특이한 일은 당시 그녀가 가명으로 활동했다는 점이다. 

    바로 그녀의 평범하지 않은 집안 배경 덕에 능력 이상의 평가를 받는다는 소문을 듣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10년대 들어서는 다시 본명으로 활동했고, 적지 않은 공공 조각 작품을 제작 설치하였다.

    거트루드는 조각가로 활동하면서 후원활동도 적극적으로 했다. 그녀는 작가 지망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작가들과 더불어 작업하면서 예술가의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를 생생하게 체험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여성 작가의 현실적인 어려움도 뼈저리게 느꼈다. 이러한 경험으로 그녀는 후원자로 나섰다. 

    그런데 그녀의 후원은 지역뿐만 아니라 국제적 규모의 전시까지 포괄한 전방위적 지원이었다. 

    그리고 후원자로서 그녀의 목표는 휘트니미술관의 공식 명칭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미국미술 진흥`이었다.

    휘트니미술관 목표는 `미국미술의 진흥`

    당시 미국 작가들은 이중고를 겪고 있었다. 하나는 경제적 고난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관심이었다. 

    사실 이러한 어려움은 당시 미국미술이 유럽미술, 정확히는 파리의 전위미술을 전범으로 삼고, 그들의 아카데미즘을 추종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에 따라 미국 주요 컬렉터들은 유럽미술품 수집에만 집중했다. 

    대표적인 예가 휘트니미술관보다 1년 앞서 1929년 11월에 개관한 뉴욕 현대미술관의 첫 번째 전시로, 그것은 유럽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세잔, 고갱, 쇠라, 반 고흐』전이었다. 

    수많은 미국 화가가 활동하고 있었음에도 그들의 작품은 미술관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거트루드는 달랐다. 그녀는 동료인 미국 작가들의 어려움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동료 작가들을 후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전시회를 개최해 주는 것과 작품을 구매해 경제적 도움을 주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것들을 실천했다.

    1907년 미국 최초의 여성 전용 사교클럽인 `콜로니 클럽`에서 전시를 기획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미국 화가들에게 기회를 제공했고, 작품 구매도 했다. 

    1914년에는 `휘트니 스튜디오`를 오픈하여 진보적인 젊은 작가들의 교류를 촉진하고, 그들을 위한 전시회를 개최했고, 작가들에게 급여와 예술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젊은 미술가들의 친구`라는 단체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 단체는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모든 작가가 응모할 수 있는 공모전을 개최하여 우수작을 전시했다. 

    그런데 1917년 그녀는 심사를 거쳐 수상작을 선정하는 공모제가 창작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더는 시행하지 않을 것임을 공표하였다. 

    그러고는 이듬해에 `휘트니 스튜디오 클럽`을 조직하여 매 시즌 무명 작가와 학생들로 구성된 전시를 열었다. 

    이 클럽은 누구든지 미술가 활동 내용만 확인되면 가입할 수 있었고, 이후 10년간 다양한 형식의 작품을 전시하였다. 

    이런 포용성과 개방성 덕에 1928년에는 회원 수가 400명을 넘었고, 가입 대기자도 수백 명에 이르렀다. 관리 능력 한계를 느낀 그녀는 또 다른 방법을 모색하며 아쉽지만 문을 닫았다.

    그녀는 작가에 대한 후원뿐만 아니라 미국미술의 진흥을 위해 동시대 유럽미술을 미국에 소개하는 것에도 적극적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1913년 뉴욕시에 있는 69연대 병기고에서 개최된 『아모리 쇼』를 재정 지원한 일이다. 

    이 전시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유럽 동시대 전위 미술작품을 소개한 대규모 전시였다. 

    이뿐만이 아니라 1926년 현대 조각의 아버지인 브랑쿠시의 비구상 작품 『공간의 새』가 미국 세관에서 미술작품으로 인정되지 못해 세금이 부과되었을 때, 이에 반대해 제기한 소송비용을 지원했다.

    1929년 그녀는 미국미술의 정수를 보여줄 수 있는 미술관의 필요성을 느껴 자신이 그동안 수집한 600여 점의 미국 작가작품을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기증하고자 했으나 거절당했다. 뮤지엄 측은 동시대 미국미술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해 11월 뉴욕 현대미술관의 개관전이 오픈하자 거트루드는 채 두 달도 안 돼서 미국미술품만을 전시하는 미술관 설립을 선언한다. 
    미증유의 대공황으로 사회 분위기는 극도로 혼란했지만 설립될 미술관의 목표는 "미국미술에 대한 무관심의 벽을 무너뜨려 미국미술이 특권을 얻을 수 있는, 어렵지만 중요한 업무에 헌신하고자 함이었다."

    미국미술을 진흥하기 위해 건립한 휘트니미술관의 소장품 선정 정책은 다른 미술관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녀는 작품 구매가 작가를 지원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임을 확신했기 때문에 미술관임에도 전시 작가의 작품을 판매했다. 

    또한 대공황 탓에 경제적으로 더욱 곤란한 상황에 직면한 작가의 작품을 먼저 구입했다. 전시는 일반전시와 비엔날레 두 가지 방식으로 개최하였다. 

    일반전시는 소장품전과 더불어 기획 전시를 열었는데, 그 전시에서는 뉴욕뿐만 아니라 미국 내 다른 지역 작가의 작품도 선보임으써 관객은 미국의 다양한 화풍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유럽 현대미술과는 달리 당시 대도시 뉴욕에 사는 고독한 현대인을 사실주의 화풍으로 그린 에드워드 호퍼가 지금도 당대를 대표하는 가장 미국적인 화가로 기억될 수 있었다. 

    비엔날레도 과거 휘트니 스튜디오 클럽 운영 기조를 따라 진보적인 다양한 형식의 작품을 제작하는 젊은 작가들 중심으로 운영했다.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작품을 선정하게 해서 작가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록펠러·구겐하임·휘트니 `진정한 후원자`

    그녀는 후원자이기 이전에 작가였다는 점이 남다르다. 

    진정 그녀는 작품이 좋고 나쁨을 떠나 진정으로 작가를 이해하여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후원했다. 

    뉴욕현대미술관 초대 관장이었던 알프레드바는 "후원자란 단순히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예술작품을 모으는 수집가나 예술가를 돕고 공공 미술관을 설립하는 자선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술과 예술가 모두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적절한 수단을 동반하여 그런 감정을 행동화할 의지를 지닌 사람"이라 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애비 록펠러, 페기 구겐하임,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 같은 진정한 후원자가 있었기에 뉴욕은 현대미술의 최고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우리나라 미술계를 자꾸 살펴보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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